아아 DMZ 저자 최현진 출판 굿플러스북 출시 2014.02.21
143쪽 11000원
<아하 DMZ>는 가족과 함께 떠나는 비무장지대 체험여행 안내서입니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한국전쟁과 DMZ의 현실에 대해 간략하게 해설하였습니다.
중간중간 만화나 만화풍 삽화가 적절히 곁들여져 있어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내용을 부드럽게 풀어줍니다.
목차를 볼까요? 현재 섬나라와 같은 한국의 상황을 지적한 후 한국전쟁의 전개과정과 DMZ의 살벌하고 슬픈 현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차를 볼까요? 현재 섬나라와 같은 한국의 상황을 지적한 후 한국전쟁의 전개과정과 DMZ의 살벌하고 슬픈 현실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역전하고 국군이 다시 서울 수복해 단숨에 압록강까지 전진==>중국이 참전하고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남쪽으로 밀려났다==>2년간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전쟁을 통해 남북 국경이 38선에서 휴전선으로 바뀌면서 사망자 150만명, 부상자 360만명, 한반도 곳곳이 잿더미.
● 38선 the38th paralle과 휴전선 Truce line의 차이 38선과 휴전선은 그 의미와 모양이 전혀 다릅니다.
38선은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된 직후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과 소련이 임시로 그은 선으로 남북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습니다.
이 때는 남북한을 오가는 철도인 경의선과 경원선, 동해 북부선이 그치지 않는 열차에 타고 남북을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휴전선은 1953년 휴전 협정으로 전쟁을 잠시 쉬러 만들어진 선에서 유엔군을 대표하는 미군이 북한, 중국과 합의하고 결정했어요.이것이 남북을 완전히 분단시키는 국경선으로 바뀐다.
그리고 휴전선은 철책이나 벽으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휴전선이 시작된 임진강변에서 강원도 고성군(강원도·에)해변까지 1292그루의 나무와 철항을 약 200미터 간격으로 세우고 두었습니다.
그러나 휴전 이후 세월이 너무 흘렀고 지금은 거의 닳고 있어 구분 못하고 대신 여러가지 전자 장비를 이용하고 휴전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군인도 들어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이 있고 군인이 아닌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민간인 통제선 the Civilian Control Line 등 다양하고 복잡한 선들이 남북 간 왕래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 비무장 지대(DMZ)비무장 지대는 1953년 휴전 협정으로 탄생한 지역입니다.
정전 협정을 맺은 당시 한국군과 북한 군이 대치하던 지점을 군사 분계선으로 정하고 이 경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 떨어진 뒤 비어 있는 이 공간을 비무장 지대에 정했습니다.
비무장 지대 안에서 군사 분계선 남쪽에 관한 일반적인 행정 및 각종 사건 사고는 유엔군 총 사령관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정전 협정을 맺은 당시 한국은 빠지고 유엔군을 대표한 미국의 사령관이 협정문에 사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문점 방문을 신청하는 것은 미군이 운영하는 유엔군 사령부입니다.
● 민통선민통 선은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이 군사 시설을 보호하고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간인 출입을 제한하는 구역입니다.
비무장 지대 남방 한계선에서 5~20킬로까지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은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군인의 작전과 군사 시설에 대한 보안 유지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농부들이 농업을 하는 것은 허용됩니다.
다만 이곳을 허가 없이 출입하거나 토지를 매매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북방 한계선 northern limit line1953년 정전 협정 체결 이후,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서해 지역의 남북 간에 이른바 해양 북방 한계선을 설정하고 이를 해군 부대에 전달했습니다.
이 선은 정전 협정에서 논의되지 않고, 1953년 8월 이후 한국군과 주한 미군의 작전 명령서에만 기록된 선입니다.
북한 측에 공식 통보된 적도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북한은 그동안 바다의 북방 한계선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국제 법에 근거한 육지에서 12해리까지의 바다를 북쪽의 바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꽃게가 이동하는 봄이 되면 북한의 배와 한국의 배가 서로의 바다라고 주장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남북이 서로 바다의 영토선을 다르게 주장하는 이유는 휴전 협정을 맺을 때 전쟁이 일어났던 지역은 육지라 바다에 대해서는 영토선의 문제를 서두르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전 협정 당시 바다에 선을 그리지 못하고 남북이 바다의 협정 선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그동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 비무장지대(DMZ) 비무장지대는 1953년 정전협정으로 탄생한 지역입니다.
정전협정을 맺을 당시 한국군과 북한군이 대치하던 지점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이 경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km 후퇴한 뒤 비어 있는 이 공간을 비무장지대로 정했습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군사분계선 남쪽에 관한 일반적인 행정과 각종 사건, 사고는 유엔군 총사령관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정전협정을 맺을 당시 한국은 빠지고 유엔군을 대표했던 미국 사령관이 협정문에 사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판문점 방문을 신청하는 곳은 미군이 운영하는 유엔군 사령부입니다.
● 민통선 민통선은 휴전선을 지키는 군인들이 군사시설을 보호하고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민간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구역입니다.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5~20km까지이며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군인들의 작전과 군사시설에 대한 보안유지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농부들이 농사를 짓는 것은 허용됩니다.
단, 이곳을 허가없이 출입하거나 토지를 매매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 북방한계선 northern limit line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서해지역 남북간에 이른바 해양 북방한계선을 설정하고 이를 해군부대에 전달했습니다.
이 선은 정전협정에서 논의되지 않았으며 1953년 8월 이후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작전명령서에만 기록되어 있던 선입니다.
북측에 공식 통보된 적도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은 지금까지 바다의 북방한계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국제법에 따라 육지에서 12해리까지의 바다를 북쪽 바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꽃게가 이동하는 봄이 되면 북한 배와 남한 배가 서로 자기 바다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남북이 서로 바다의 영토선을 다르게 주장하는 이유는 정전협정을 맺었을 때 전쟁이 났던 지역은 육지였기 때문에 바다에 대해서는 영토선 문제를 서둘러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전협정 당시 바다에 선을 그리지 못하고 남북이 바다의 협정선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하면서 그동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 지뢰 지뢰 지뢰는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땅속에 묻어 둔 폭탄입니다.
지뢰의 가격은 싸고 한발 4000원 정도입니다만,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무서운 전쟁 무기입니다.
고성능 화약이 들어 있는 현대적 지뢰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에 등장했다.
지뢰는 제1차 세계 대전과 동시에 맹위를 떨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양 진영의 군인들이 참호를 파고들어 지루한 소모전의 양상으로 진행한다.
양측은 서로의 참호를 잡으려고 필사의 돌격을 감행하고 기관총과 함께 지뢰는 효과적인 방어 무기로 사용됐다.
지뢰는 독자적인 살상력과 파괴력으로 적의 전진을 효과적으로 지연 효과가 있었다.
네이버 지식 백과
● 지뢰 지뢰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도록 땅속에 묻어둔 폭탄입니다.
지뢰의 가격은 저렴해서 한 방에 4000원 정도이지만 단번에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무서운 전쟁 무기입니다.
고성능 화약이 들어 있는 현대적 지뢰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등장했다.
지뢰는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맹위를 떨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양 진영 군인들이 참호를 파고들어 지루한 소모전 양상으로 진행된다.
양측은 서로의 참호를 잡기 위해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했고 기관총과 함께 지뢰는 효과적인 방어무기로 사용됐다.
지뢰는 독자적인 살상력과 파괴력으로 적의 전진을 효과적으로 늦추는 효과가 있었다.
네이버지식백과
한국에서 대인 지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 전쟁 때부터.특히 휴전 전까지 휴전선을 중심으로 북한군과 유엔군은 M14라는 플라스틱 대인 지뢰를 헬리콥터와 비행기를 이용하고 휴전선 일대에 뿌렸다는 것입니다.
한국군의 지뢰 피해자 대부분은 아군이 달린 지뢰에 의해서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50년대 후반부터 평화적인 분위기가 고조되다, 민통선 안에 논밭을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 농민들이 일하는 중에 많은 지뢰 사고를 당한 지뢰는 현존하는 무기 중 가장 비인도적인 무기로 꼽힌다.
지뢰로 희생된 군인보다 민간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전 세계 60여개국에 1억 개가 넘는 대인 지뢰가 쓰이는지 혹은 방치되고 있다.
이런 지뢰로 목숨을 잃거나 장애가 되거나 하는 사람은 매년 2만 6000여명에 이른다.
이 중 대부분은 민간인, 특히 이 중 75%는 지뢰를 장난감으로 오인한 아이들이다.
이 때문에 국제 사회는 1997년 캐나다 오타와(Ottawa)에서 대인 지뢰 사용을 금지하는 대인 지뢰 사용 및 비축, 그리고 이전 금지 폐기에 관한 국제 협약을 체결한다.
2003년까지 150개국이 서명했지만 아직 40여개국을 넘는 국가가 가입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은 한반도 안보 상황을 고려하고 비무장 지대의 지뢰는 예외로 인정하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입하지 않은 상태이다.
네이버 지식 백과● DMZ의 나무 DMZ에는 20년 이상 된 나무가 20%미만입니다.
한국 전쟁 당시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휴전 이후 군대가 오래 머무는 생태계를 보존할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전선 근처에는 세계적으로 귀한 새를 많이 방문합니다.
매년 겨울이 되면 두루미 무리가 휴전선 근처의 철원 평야를 찾습니다.
두루미는 지구상에 16종 있다는데, 세계적으로 약 1600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 위기종의 희귀조입니다.
그 밖에도 100종류 이상의 귀한 새를 볼 수 있습니다 철원 평야는 민통선 안에서 유일하게 농사를 짓기 때문에 곡식류가 좋아하는 새가 많이 방문합니다.
특히 여기서 일하는 농부들은 일하는 시간이 제한되고 있고, 급하게 농사를 지어서 벼 알갱이를 많이 떨어뜨리므로 미국을 좋아하는 쥐들이 들끓는 생쥐를 먹이로 하는 나비 같은 새들이 많아요.● ▲ 금상첨화 사업 사업-1989년 남북 간에 처음 금강산 관광 사업 합의(정주영 회장&김일성 주석)-1997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이후 남북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고 1998년 해에 금강산 관광 개시-02년 금강산 육로 관광 시작-08년 한국인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 경비 군인이 쏜 총에 사망하자 금강산 관광 중단 ● 개성 공단 사업-03년 휴전선 인근의 북한 제2의 도시 개성에 남북이 협의하고 대규모 공업 단지 건설 개시(개성은 서울과 직선 거리로 60km)..-04년 개성 공단에서 생산된 상품이 한국 백화점에서 처음 판매되지만, 품목은 냄비(라면 국물을 만들 때 사용)에서 진열된 지 1시간에 매진.● ▲금상산 관광사업-1989년 남북간 최초로 금강산 관광사업 합의(회장 정주영 & 김일성 주석)-1997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남북관계가 조금씩 개선돼 1998년 바다에 금강산 관광 개시-2002년 금강산 육로 관광 개시-2008년 남측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 경비군인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자 금강산 관광 중단●개성공단 사업-2003년 휴전선 인근 북한 제2의 도시 개성에 남북이 협의해 대규모 공단 건설 개시(개성은 서울과 직선거리 60km)..-2004년 개성공단에서 처음 생산된 상품이 한국 백화점에서 처음 생산됐다.
● 철도 연결 사업-분단 전에는 기차를 타고 세계 여행이 가능.당시 남북을 오가던 철도가 총 3개 있었습니다(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한 경의선 서울과 원산을 연결한 경원선, 강원 지역의 해변을 달리던 동해 북부선)전쟁이 끝난 후에 4편으로 증가.(과거 북한 영토였던 철원이 한국에 편입되고 경원선의 중간 지점에서 금강산 쪽으로 갈라졌던 금강산 철도가 이에 포함됐기 때문)현재 경의선은 임진각을 넘어 도라산 역까지 운행.경원선은 경기 도싱이나리까지 운행, 동해 북부 선과 금강 산행키의 철도는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2000년 6·15공동 선언(김대중 대통령,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후 끊겼던 철도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의선 철도와 동해 북부 선의 철도).다만, 열차는 아직 다니지 않았지만.● 파주 파주는 휴전선상에서 서울과 직선 거리로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습니다.
남북이 분단될 때까지 중국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길이어서 철도와 도로가 발달한 지역이었죠.2000년 남북 정상 간 약속한 6·15공동 선언에서 남북을 잇는 철도와 도로가 건설되고 파주 바로 북쪽에 개성 공단을 설립합니다.
특히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때 파주에서 개성을 거쳐서 평양까지 육로로 이동…… 그렇긴**자유의 다리, 임진각에는 망베당을 건너 민간인 통제 구역 앞에 자유의 다리가 있습니다.
정전 협정 이후 북에서 내려온 국군 포로를 통과시키기 위해서 전쟁으로 파괴된 임진강 철교 위에 급히 나무로 만든 다리입니다.
북한의 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갔다는 점에서 자유의 다리라는 이름 붙여졌습니다.
.당시 만들어진 임시 가교는 지금은 없어지고 현재 설치되어 있는 자유의 다리는 당시의 형태를 그대로 본떠서 관광용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도라산 역이 끊어진 경의선 복원에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 회담 후 공사가 시작.2002년 완공 이후 국내선의 마지막인, 국제선 출발 역이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방문,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평화 선언을 발표.국제선 출발점이라 국내의 다른 역에는 없는 출입국 관리 사무소를 두었습니다.
.2007년 남북 시험 운행 이후 하루 1회 이상 정기적으로 개성 공단을 오가는 열차가 출발했지만 지금은 운행 중단.국내선은 파주민통 선 지역의 관람객 때문에 하루 6회 정도 운행** 제3톤 네루 1978년 10월에 발견되어 철원에서 발견된 제2터널과 비슷한 규모.판문점 남쪽 4지점의 비무장 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터널은 1시간에 3만명의 무장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입니다.
**서울까지는 불과 44km.**통일촌 1978년 제대 군인과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만든 마을에서 당시 한국보다 부자였던 북한에 잘 사는 한국을 보이기 위해서 만든 대북 선전 마을이었습니다.
처음 마을에 입주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군사 훈련을 받았대요.(평소 농사를 짓고 있어 비상시에는 총을 들고 맞서야 했기 때문)마을이 속한 장단 면은 한반도에서 처음 콩을 재배한 지역입니다.
이 지역의 콩은 맛있고, 조선 시대에는 임금에게 진상되었습니다.
입주 당시는 80가궀지만 현재는 2배가 넘는 169가구가 살고, 민통선의 마을 가운데 가장 풍부한 마을의 하나로 되었습니다.
**대성동 대한민국 최북단 마을에서 유일하게 DMZ내에 있는 마을입니다.
230여명의 마을 주민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며 고향 땅에 살지 사람들 때문에 DMZ내에 유엔의 승인으로 만든 마을입니다.
마을의 눈앞에 북한의 DMZ마을인 키죠은동이 있고 군사 분계선까지 불과 400m이므로 유엔사 경비 대대 사령관의 통제와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밤은 11시까지 집에 돌아가야 하고 논밭으로 일하러 갈 때는 꼭 신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북한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풍부한 정으로 보여야 하므로 1가구당 연평균 소득이 1억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
북한으로 떠받드는 기종동과 경쟁하고 태극기 꽂이가 있습니다.
북한으로 떠받드는 기종동에 걸린 북한의 인공기는 세계 최고 높이에 세계 최대의 깃발을 내걸고 있어 키죠은동에는 세계 2번째 깃발의 크기와 깃대 높이를 자랑하는 태극기가 걸리고 있습니다.
**남북 공동 경비 구역 JSA(Joint Security Area)북한의 판문각과 한국의 자유의 집은 군사 정전 위원회 건물과 함께 남북 공동 경비 구역을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의 유엔군 3초소 근처에서 일어난 도끼 만행 사건 이후 공동 경비 구역 내에는 높이 50㎝의 콘크리트 군사 분계선이 설치되어 남북 경비병의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현재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북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는 공간은 군사 경계선 위에 설립된 군사 정전 위원회 건물 안만.이 건물은 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하나씩 있으며 밖에 나갈 때는 들어온 문으로 다시 나가야 합니다 ● 쇠 원철라는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북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철원을 차지하는, 철원의 대부분은 한국 영토가 되었습니다.
전쟁 당시 철원 지역은 남북이 가장 격렬한 정쟁을 벌인 곳.철원은(1)경원선에 가는 철도 중간에 있는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다(2)산이 많은 강원도에서 가장 큰 평야를 가진 곡창 지대였기 때문에(3)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 하나로 발달했습니다.
**백마고지 공중에서 보면 심한 포격으로 파괴된 모습이 백마의 것이라는데 미국 기자가 임의로 명명한 이름.**노동당 네 제곱 히토쓰바시, 농산물 검사소와 함께 거의 기적적으로 저장된 지상 3층.1946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철원 시가지가 비행기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한국 전쟁 당시 건물의 안팎의 산으로 폭격이 어려웠대요.그래서 철원에 주둔한 미군은 당사를 파괴하기 위해서 탱크에서 계단을 오르고 포 사격을 했습니다.
정면은 원형 그대로였지만, 뒷면의 계단 쪽의 벽은 완전히 무너졌어요**철원 역 철원 역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길이 226km의 한가운데에 위치.철원 역을 기점으로 경원선과 금강산 철도가 나뉘어 있지만, 철원 역은 김 샹산 철도의 시작 지점도 겸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철원 역은 역무원 수만도 80여명으로 서울 역의 역무원 수보다 많았대요.그러나 전쟁으로 역사와 철로 등 모든 시설이 파괴된···** 제2터널